1. 서론: 정신질환 치료제, 왜 이리 개발이 어려운가?
신체 질환 치료제의 진보는 지난 수십 년간 놀라운 성과를 이뤘지만, 뇌의 병—즉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느린 길을 걷고 있다. 우울증, 조현병, 양극성 장애, 불안장애 등 정신질환은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 이상이 겪고 있는 질병이며, 사회경제적 부담 또한 막대하다. 그러나 신약 개발 속도는 여전히 더디며, 실제로 많은 글로벌 제약사들이 정신질환 분야에서 철수하거나 R&D를 축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러한 배경에는 뇌과학의 복잡성, 정확한 바이오마커 부족, 환자군 이질성, 임상시험의 어려움 등이 겹쳐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AI, 디지털 바이오마커, 뇌영상 기술, 마이크로도징 기반 임상 등 기술의 진화와 함께 신약 개발의 돌파구가 조금씩 열리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정신질환 치료제 개발의 본질적 난제와 최신 동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2. 정신질환 치료제 개발의 주요 난제
1) 병인 기전의 불확실성
우울증이나 조현병은 단일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질환이 아니다. 유전, 환경,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 스트레스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며, 환자 간 표현형의 차이도 크다. 이는 명확한 표적을 설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이 환자에게 이 약이 왜 효과가 있었는가’를 설명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기존의 항우울제인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는 세로토닌 농도를 높이는 방식이지만, 모든 환자에게 효과적인 것은 아니며, 작용 기전도 여전히 100% 명확하지 않다.
2) 바이오마커 부재
암, 심혈관 질환, 감염병은 특정한 바이오마커(예: PSA, LDL, 바이러스 수치 등)를 통해 진단과 치료 반응을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혈액이나 조직을 통해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거의 없다.
이는 약효를 확인하기 위한 임상시험 설계에 큰 장애물이 된다. "기분이 나아졌나요?"라는 주관적 질문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여전히 많으며, 이는 플라시보 효과와의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
3) 임상시험의 어려움
정신질환은 증상의 다양성과 변화가 크기 때문에 임상시험이 특히 어렵다. 또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난제를 만든다.
- 플라시보 효과가 매우 큼 (우울증 치료제 임상에서는 플라시보군 반응률이 30~50%에 달함)
- 피험자의 이탈률 높음, 장기간 치료가 필요
- 표준화된 측정 도구 부족
- 환자군 이질성 (예: 조현병의 음성증상 vs 양성증상 등)
4) 사회적 낙인과 제약사의 전략 변화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여전히 존재하며, 임상시험 참여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또, 대형 제약사들이 과거에는 정신과 영역에 집중했지만, 시장성 부족과 높은 리스크로 인해 일부 철수하거나, 항암제와 같은 수익성 높은 분야로 이동하는 경향도 보인다.
3. 기존 치료제의 한계와 사용 실태
1) 우울증
가장 흔히 처방되는 SSRI, SNRI, TCA 등의 항우울제는 1950년대부터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치료 반응률은 약 60~70% 수준이며, 30% 가량은 치료 저항성을 보인다. 효과 발현도 느리며, 약물 부작용(불면, 성기능 장애, 체중 증가 등)도 적지 않다.
- 에스케타민(esketamine): 기존 SSRI와 달리 NMDA 수용체에 작용하는 빠른 작용형 항우울제로, 자살 위험이 높은 환자에게 사용
- 사이클로세린, LSD, 실로시빈 등 사이키델릭 약물도 최근 치료 저항성 우울증에서 재조명되고 있음
2) 조현병
현재 사용되는 조현병 치료제는 대부분 도파민 D2 수용체 차단제로 작용한다. 이는 환청, 망상 등의 양성 증상에는 효과적이지만, 의욕 저하, 사회적 위축, 인지 저하 등의 음성 증상에는 효과가 미미하다. 또한 장기간 사용 시 추체외로계 부작용(운동장애, 구강운동장애 등) 문제가 크다.
- 아리피프라졸, 라목사핀 등 비정형 항정신병약물이 비교적 부작용이 적고 효과 범위가 넓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치료효과는 부족하다.
4. 최신 연구 동향과 차세대 치료 전략
1) AI 기반 분자 설계 및 표적 발굴
최근에는 인공지능을 통해 정신질환 관련 유전자의 상호작용, 단백질 네트워크를 분석하여 새로운 타깃 분자나 생체 경로를 예측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 Deep Genomics, Atomwise 등 AI 제약 플랫폼 기업들은 유전자 변이와 정신질환 간 관계를 정밀 분석
- Neumora Therapeutics는 AI와 신경생리학 데이터를 통합하여 정신질환의 표현형을 정량화하고 개인화된 약물 개발을 추진 중
2) 신경염증 경로 표적화
최근에는 정신질환이 단순히 ‘화학물질 불균형’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염증(neuroinflammation)이 중요한 기전이라는 연구가 늘고 있다. 미세아교세포의 과활성, 염증성 사이토카인의 증가 등이 우울증, 조현병 등과 연관 있다는 것이다.
- IL-6, TNF-α 억제제 등 면역조절제가 정신질환 치료제로 임상시험 중
-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뇌-장 축(brain-gut axis) 연구도 활발
3) 디지털 바이오마커와 디지털 치료제(DTx)
스마트폰, 웨어러블 기기에서 수집되는 수면, 운동, 언어 패턴 등을 기반으로 우울증이나 조현병 악화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 MindStrong Health, Woebot Health 등은 스마트폰 활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서 상태를 추정하고, 디지털 치료까지 제공
- FDA는 우울증, 불면증에 대한 디지털 치료제 일부를 이미 승인
4) 사이키델릭 약물의 재부상
LSD, 실로시빈(psilocybin), MDMA 등 환각제 성분이 최근 들어 심각한 치료 저항성 정신질환에서 의미 있는 치료 반응을 보여 다시 주목받고 있다.
- MAPS 연구소는 MDMA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제로 FDA 승인 단계까지 진행
- COMPASS Pathways는 실로시빈을 이용한 우울증 치료제 임상 3상을 진행 중
5. 주요 글로벌 기업 및 파이프라인
Biogen | 우울증 및 조현병 관련 신경염증 억제제 | 기존 CNS 분야 전문 기업 |
Johnson & Johnson | 에스케타민(Nasal Spray) 상용화 | TRD(치료저항성 우울증) 승인 |
COMPASS Pathways | 실로시빈 기반 치료제 | 유럽 중심 임상 3상 진행 |
MindMed | LSD, DMT 기반 신약 | 정신과 파이오니어 스타트업 |
Neumora | AI 기반 맞춤형 정신질환 치료제 | Lilly, Amgen과 협력 중 |
Otsuka | 조현병 치료제와 디지털 치료제 병용 개발 | Abilify MyCite 등 주도 |
6. 국내 정신질환 치료제 개발 경향
한국에서도 정신질환 관련 치료제 R&D는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기존에는 학계나 국책 과제 중심이었으나, 최근에는 벤처기업과 제약사들의 진출도 늘고 있다.
- 한미약품: 정신질환 분야에 대해 기초연구 및 공동연구 프로젝트 진행 중
- JW중외제약: CNS 치료제 개발을 위한 유전자 분석 기반 연구 진행
- 바이오벤처인 아이엠비디아, 에이아이더블유 등은 디지털 치료제와 신약 개발에 진출
- 서울대병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등은 AI와 뇌파 기반 디지털 바이오마커 연구 진행
7. 결론: 뇌를 이해하기 위한 긴 여정, 그러나 희망은 있다
정신질환은 여전히 ‘가장 풀기 어려운 의학적 퍼즐’ 중 하나다. 단순한 약물 개발을 넘어서, 환자 개개인의 뇌 신호, 유전적 특징, 환경 요인까지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이는 곧 정신의학의 패러다임이 ‘정신’에서 ‘뇌 기반 생물학’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기술의 진보가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약물, 디지털 치료제, AI가 협력하여 더 나은 삶을 만드는 그날까지, 우리는 여전히 이 미로 속을 탐험하고 있다. 그 여정은 느리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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